추억, 또 다른 의미
찰옥수수
차가운 바람이 달빛을 흔들었다. 달빛은 아름답기보다는 서늘했다. 살 속으로 파고드는 달빛의 서늘함은 잠시 잊고 지냈던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이 깨어나게 했다. 딸들의 애교에 아버지들은 피로가 풀린다는데 나는 아버지에게 그다지 살가운 딸이 아니었다.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내는 형식적인 딸에 불가했었다. 내가, 아버지에게 겨우 다가갈 용기가 생길 때 이미 아버지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살아생전 한량이라는 애칭을 가질 정도로 놀러 다니는 걸 좋아했다. 빚을 내서라도 놀러 다니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남매들은 빚을 갚느라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의 빈자리를 미처 느낄 새도 없이 빚에 허덕이자 그리움은 원망이 되고 그마저도 금세 무디어져 버렸다.
아버지의 직업은 막노동꾼이었다. 막노동꾼이다 보니 불러주지 않으면 집에 있는 날이 더 많았다. 아버지를 대신해 매일 일하러 나가는 사람은 엄마였고 딸들이었다.
부잣집의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집안일은 일꾼들이 도맡아했고 형제들은 사업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사람이 좋아서 형제들이 사업자금이 필요하다하면 두말하지 않고 돈을 마련해 주었고 심지어 동네 사람들에게까지 인심이 좋았다. 그러다가 형제들의 사업이 실패와 새로운 사업을 반복하더니 어느덧 전답에 집까지 모두 탕진하고 말았다. 결국엔 일거리를 찾아 가족 모두가 서울로 올라와야만 했다. 아버지는 가난해도 자식들만큼은 쌀밥을 먹일 거라며 공사장 여기저기 다녔다. 아버지의 이런 약속을 나중에서야 듣게 되었다. 아버지의 각오를 듣게 될 때까지 그저 무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늘 일하던 시간보다 집에서 잠든 모습을 자주 봤기에.
나의 가난은 그랬다. 먹고 사는 게 힘들어서 필요한 것이 있어도 선뜻 살 수가 없었다. 학교에 갈 때도 번번이 준비물을 챙겨가지 못한 날이 더 많았고 공책은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히 필기를 했다. 일찍부터 직장 생활을 했지만 내 용돈도 없이 고스란히 집에 월급을 통째로 갔다 줬다. 고스란히 월급을 줬어도 집안 살림은 나아지기는커녕 아버지가 놀러갔다 오는 날은 한달 버티기도 버거웠다. 아버지는 놀러 가면 그냥 오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12개월짜리 지로용지를 들고 왔다. 그때는 지로용지가 신용카드처럼 할부로 사용되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한숨을 쉬며 지로용지를 만지작거렸다. 묵묵히 엄마의 손에 넘겨지는 지로용지가 한 장씩 뜯겨 나갈 쯤. 방안 한켠에 먼저 사들인 물건 속에서 쓸데없는 애물단지가 될 거였다. 엄마는 분에 못 이겨 넘기던 지로용지를 획하고 던졌다.
논일을 하고 저녁때가 넘어서야 들어서는 아버지에게 어떻게 갚을 거냐고 엄마가 또 한소리 했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반복해서 ‘알아서하겠다.’ 그런 아버지의 목소리가 무책임함으로 들려왔다. 12개월, 지료용지는 고스란히 내 몫이기에 두 분의 말을 엿듣다가 내방으로 들어서자마자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 한숨은 일순간 방바닥에 커다란 블랙홀을 만들어 버렸다. 그 안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러 발끝으로 지탱하며 버티었다. ‘으휴, 이놈의 집구석 나가던가 해야지 지겨워서 못살겠다.’ 머리카락을 잡아 뽑듯이 거칠게 쓸면서 마구 헤집어도 속앓이는 풀리지 않았다. 그 틈을 비집고 블랙홀은 끝임 없이 회오리치면서 나를 집어삼킬 듯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아버지도 눈치가 보였는지 모내기를 끝내자마자 막노동일자리를 알아보러 나갔다. 일자리를 구했는지 며칠 동안 아버지는 집에 오지 않았다. 직장생활을 하기 전에는 아버지가 집에 오시기만을 기다렸던 시절도 있었다. 막노동 일이 끝나고 돌아올 때 아버지가 양손 가득히 한보따리 과자를 사왔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우리들의 잔칫날이었다. 그때만큼은 아버지가 자식을 아끼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것도 잠시 아버지가 여행 중에 들고 온 지로용지가 쌓일 때마다 아버지에 대한 애정은 어느 순간 정나미마저 떨어졌다. 나는 늘 그 집에서, 아버지의 그늘에서, 도망치기위해서, 꿈을 키웠다. 혼자 사는 꿈을.
20대에 접어들면서 고향을 떠날 계기가 생겼다. 다니던 회사가 이주하자 시골집에서 벗어났다. 집에서 나와 살다보니 부모님에게 점차로 무심해져갔다. 다달이 부모님 집에 돈을 부치고 나면 남는 건 겨우 차비뿐이었지만 나의 집에 들어서면 웃음이 났다. 조금 여유가 생기면 시골집에 내려가기 보단 마음 맞는 친구와 산행을 즐기고 여행을 즐겼다.
동료들이 어쩌다 부모님과 놀러 갔다 온 얘기를 할 때면 나에게는 다른 세계의 말처럼 들렸다. 어쩌면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다녀 본적이 없어서 같이 어디를 간다는 것이 낯설었다. 어차피 아버지는 혼자서라도 여행을 잘 다녔기에 특별히 따로 모시고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할 필요조차 못 느꼈다. 아니다. 아버지와 얼키설키 어디를 다니기를 피했던 것 같다. 때가되면 달이 둥그렇게 차오르듯이 아버지도 우리 곁에 언제까지나 있을 거라는 마음으로 살았다.
어느 정월보름달이 뜨던 밤. 아버지가 이생에서 마지막으로 숨 쉬시던 날이 되었다. 아버지를 외면하며 살고 있는 나를 힐책하듯 건강하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려졌다. 삼년을 넘게 병상에서 계실 때에 나는 어쩌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더 이상 아버지가 지로용지를 들고 오는 일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할 때였다. 발아래로 사진 하나가 떨어졌다. 어디서 찍은 것인지 모르지만 아버지의 독사진이었다. 사진속의 아버지는 허리춤에 손을 얻고 나무에 기대여 잔뜩 폼을 잡은 모습이었다. ‘멋지다 우리아버지.’ 사진을 앨범에 넣으려다가 멈칫했다. 아버지와 함께 찍은 곳이라고는 가족 중, 결혼할 때 예식장과 부모님의 집뿐이었다. 아버지의 독사진을 보면서 어느 도시에도, 어느 거리에도, 어느 장소에도, 아버지와 함께한 추억이 없었다는 걸 알았다. 그 생각에 미치자 쓸쓸함은 깜깜한 밤하늘이 보름달을 야금야금 잡아먹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만들어 놓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혀왔다. 무거운 돌덩어리가 가슴을 점점 짓눌러 오더니 이기적인 나의 마음에 벌을 내리듯 가슴팍에 꽉 박혔다. 달이 뜨는 날만큼 돌덩이도 커지고 있는 것 같았다. 허나 아버지가 남겨놓고 간 빚을 감당하느라 보름달이 뜨고 지는 지도 모른 채 세월은 미친 듯이 흘러갔다.
어느날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에게 말도 없이 동생네가족끼리 여행 다녀온 것이 못내 서운했는지 전화로 하소연 했다. 손녀가 할머니하고 통화하면서 아빠랑 엄마랑 언니랑 계곡에 놀러가서 재미있게 물놀이 하고 왔다며 조잘거린 게 사단이 났다.
“엄마! 애들끼리 놀러가는 데 엄마가 따라가면 제대로 놀지도 못하잖아요. 계곡에 가려면 산길을 걸어야하는데 다리 아픈 엄마가 어떻게 올라가요. 거기가면 엄마도 고생이고, 애들도 고생시키는 거잖아요.”
“하긴 그렇다.”
서운해 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자 추억거리 하나 없이 떠나보낸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와 못했던 추억을 이번 기회에 엄마하고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딸들과 놀러가자며 달래줬다. 먼훗날 엄마가 우리 곁을 떠나도 그곳에 가면 ‘여기 엄마랑 왔었던 곳이다.’ 하면서 마음을 달래러 갈수 있는 곳 하나쯤은 만들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가 변화면서 점차로 핵가족화가 되다보니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각자의 생활을 즐긴다. 여행지에 가보면 친구들과 오거나 어린자녀들을 동반한 가족들이 대부분이다. 부모님과 함께 온 아들딸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부모님과의 여행이 다소 어색하더라도 함께 다니면서 작은 추억의 지도를 만들어 둔다면, 마음에 바람이 부는 어느 날 그곳은 또 다른 의미로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동안 못했던 여행을 엄마와 틈틈이 다니면서 달빛을 손에 가득 채우는 따사로운 밤을 보내고 싶다.
'수필나부랭이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논두렁 밭두렁 (0) | 2022.01.06 |
---|---|
사진이 말을 걸어온다. (0) | 2021.12.22 |
엄마와 호미 (0) | 2021.11.24 |
길 위에서 문학을 읽다. (0) | 2021.11.10 |
엄마의 계절 (0) | 2021.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