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호미
찰옥수수
엄마는 낡은 수건을 둘러쓰고 텃밭에서 호미질에 여념이 없다. 농작물을 심는 엄마 머리위로 7월의 태양이 작열했다. 엄마를 불러도 밭을 메냐고 대답이 없다. 다시금 엄마를 부르자 우리를 보면서 환하게 웃으며 쪼그리고 앉아있던 다리를 옮기는 걸음이 위태로워 보였다.
저녁을 먹고 평상에 둘러앉았다. 말린 쑥을 피워놓고 바람에 따라 가끔씩 콧속으로 연기가 들어와도 좋은 밤이었다. 도시에서 보지 못했던 별들이 하늘가득 촘촘히 박혀있었다. 별들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는데 옆에서 끙끙거리는 소리에 돌아다보니 엄마가 앙상해진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엄마 곁에 바짝 다가갔다.
그날 밤, 엄마는 처음으로 넋두리 같이 살아온 인생을 이야기했다. 할머니가 왜 그리도 엄마에게만 인색하고 모질게 했는지 모르겠다며 서러움을 풀어냈다.
할머니는 엄마에게만 유독 시집살이가 심했다. 어느 날 아침밥을 짓고 있을 때였다. 할머니가 부엌으로 들어오더니 뜸 드리던 밥솥뚜껑을 슬쩍 열어 허리춤에 숨겨 들고 온 한 움큼의 흙을 확 뿌렸다.
“어미 너는 밥 만 하고 있을 것이여. 할 일이 얼매나 많은 디 밥 만 하고 앉아 있는 거여.”
할머니는 다 된 밥에 흙을 뿌린 것도 모자라 엄마에게 욕설을 퍼붓더니 손을 탈탈 털고 나갔다. 할머니의 그림자가 부엌에서 나갈 때까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엄마는 덜 익은 밥을 바가지로 건져내었다. 조리로 흙이 들어간 쌀을 살살 건져내 밥을 다시 지어 내갔다.
“시어미 배고파 죽으라고 이제야 밥을 주는 것이여.”
할머니 때문에 끼니때를 놓쳤는데 이유 불문하고 둘러엎은 밥상은 마당으로 내동댕이쳐져 사방팔방 밥이며 반찬들이 널브러졌다. 엄마는 밥상을 다시 차려주고 호미를 챙겨 텃밭으로 나갔다.
할머니에게 하지 못했던 말들을 엄마는 호미로 화풀이하듯 밭을 찍어대면서 한 움큼의 풀을 뽑아냈고 흙속에 시름을 묻어 다독였다. 엄마의 호미는 시집살이가 고될수록 할머니로부터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속풀이 도구였다. 텃밭은 엄마가 맘 놓고 숨 쉬면서 넋두리를 심는 곳이 되어갔다.
엄마는 종갓집 맏며느리다. 명절뿐만 아니라 한 달에 두세 번씩 있는 제사 때마다 그 많은 음식을 혼자서 만들었다. 일찍 부모를 잃은 엄마는 시집살이가 고되어도 그 집만이 유일하게 살아가야 할 곳이기에 구박 받으면 받는 대로 묵묵히 일만 했다. 시집살이가 고될수록 소가 핥아 놓은 것처럼 텃밭은 반질반질 했다.
엄마의 넋두리가 늘어갈수록 딸들도 엄마와 맞장구를 치게 되었다. 엄마가 아들을 낳았어도 시집살이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할머니에게 손자는 남들 다 낳는 아이였다. 둘째 애는 손녀를 낳았다고 구박이 심해졌다. 그래서 손녀들은 할머니에게 이유 없이 미움을 받았다. 손녀들이 행여 집을 나갈 때 남자보다 앞서서 문턱을 넘기라도 하면 그날은 하루 종일 할머니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여자가 앞서가면 남자들의 기가 눌려버려서 앞길이 막힌다는 이유였다. 할머니의 억지스러운 말에 손녀들은 마음에 늘 상처가 쌓여갔다. 엄마는 텃밭이라도 나갈 수 있었지만 어린 손녀들은 속수무책으로 잔소리를 들어도 풀어낼 곳이 없었다며 엄마에게 할머니의 만행을 풀어냈다. 나의 얘기를 들은 엄마는 내 손을 잡으며 조물조물 거렸다.
아버지는 목수 일로 자주 집을 비웠고 엄마마저 공장식당에 취직을 하자 어린 우리들을 볼 봐 줄 사람은 할머니뿐이었다. 할머니는 텃밭이며 집안일은 거의 하지 않은 채 밥만 겨우 해주었다. 그런 할머니가 불평을 해도 엄마는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일을 찾아 호미를 챙겼다. 엄마는 일찍 퇴근을 하거나 쉬는 날에도 어김없이 텃밭으로 나갔다. 수북이 올라 온 풀들을 뽑아내며 쪼그리고 앉아 연신 호미질을 했다. 엄마에게 텃밭은 안식처였다. 밤마다 엄마는 ‘아이구 다리야, 아이구 다리야.’ 하면서도 어김없이 텃밭을 일구었다.
어느날,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던 엄마가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사정을 알고 봤더니 할머니가 동네 사람과 싸움을 하면서 심한 욕을 했다.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싸움을 말렸다. 할머니는 역정이 났다. 역정이 난 할머니는 싸움을 말리던 아버지에게 동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고래고래 욕을 퍼부었다. 아버지는 그런 봉변을 당하고도 말없이 할머니를 집에 모셔다 드리고 논에 갔다 온다며 나갔다. 엄마는 괭이를 들고 논으로 가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안쓰러워서 속상한 마음에 눈시울을 붉혔던 것이다.
엄마는 해가 지고 있는데도 나에게 밥 먹으라고 하면서 담벼락에 걸쳐 놓아둔 호미를 꺼내 텃밭으로 나갔다. 호미질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텃밭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엄마의 어깨가 심하게 요동쳤다. 호미질 소리가 마치 엄마의 통곡으로 들렸다.
나는 할머니가 쓰고 계시는 안방을 바라보았다. 안방 문을 열자 할머니는 텔레비전을 보며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엄마의 호미가 되어 주기로 했다. 그때부터 할머니가 잘못된 말을 하거나 행동을 보이면 날카로운 호미 끝을 세우고 박박 긁기도 하고 콕콕 쪼아대기도 하며 반발하기 시작했다.
밤이 깊도록 속풀이 하던 엄마가 다리를 주물러주고 있는 나를 힐끔 보더니 ‘언제 그렇게 컸는지 할머니로부터 든든한 내편이 되어줘서 좋았다.’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돌아눕던 엄마의 어깨에 들숨날숨 포근한 어두움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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