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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문학을 읽다.

옥수수다 2021. 11. 10.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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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에서 문학을 읽다.

 

 

                                                                                                                                           찰옥수수

 

  봄바람에 엉덩이가 들썩거리고 햇살은 대지 위로 나른함을 내린다. 대지는 나른함에 무거운 눈꺼풀을 치켜뜨며 새순들이 피어난다. 꽃향기가 가슴을 살랑살랑 두드리며 간질거리던 어느 봄날. 가벼운 가방이라도 꾸려서 나들이 하고 싶던 그때 소식이 왔다. 동아리를 함께 한 친구들이 오랜만에 문학기행을 가자는 연락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몇 해 동안 2개월에 한번씩 가던 기행이다. 임원들은 답사를 하고 온 사진을 토대로 기행에 관한 책자를 만들었다. 기행에 동행한 순간들이 지금도 내 책꽂이 한켠을 차지한 채 먼지가 쌓여 가고 있었다. 임원들의 생활이 바빠지고 답사는 물론 기행 보 만드는 것도 힘에 부치기 시작하면서 한 동안 문학기행이 중단되었다. 몇 년이 훌쩍 지나고 나서야 서로 얼굴보자는 취지로 통영을 가게 된 것이다.

 

  전세버스가 내달려서 처음 도착한 곳은 통영의 동피랑마을이다. 동피랑은 동쪽 언덕위에 마을이라는 뜻으로 낙후된 마을을 철거하여 공원을 만들 예정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벽화가 입소문으로 유명해지면서 아름아름 관광객이 늘어났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도 벽화를 보기위해 간 것인지 사람 구경하러 간 것인지 모를 정도로 인산인해였다.

 

  벽화는 바다와 가까워서 그런지 푸른빛이 담은 그림들이 많았다. 마치 바다 속 마을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돌고래가 그려진 골목길에서는 고래 등에 올라타서 바다를 질주하는 듯 했다. 긴 계단을 질주하다 다른 골목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헤나문양의 그려진 하늘색 대문을 보자 마음이 요동치고 눈은 매료되었다. 그 문을 열면 바다 왕궁 속으로 빨려 들어 갈 듯 했다. 눈을 뜨면 에메랄드 사파이어에 진주빛깔이 감도는 조개껍질로 지은 아름다운 성, 물고기들이 드나들도록 구멍이 송송 뚫린 신비한 바위, 형형색색의 산호초가 마치 춤을 추는 듯 물결에 흔들리고, 바다로 떨어진 햇살을 품은 빛으로 조개껍질 왕궁엔 무지개를 가득 띄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곳에서 유유히 헤엄치고 있을 수많은 물고기들을 상상하다가 나도 모르게 웃으면서 가던 길을 걸었다.

  다른 골목길로 들어선 순간 세상에 태어났지 얼마 안 된 조카네 아기와 같은 이름을 보자마자 사진 찍어 보냈다. ‘어느새 이곳까지 찾아와서 그림과 시를 써놓고 갔니.’ 전송하자 바로 눈웃음 이모티콘 답장이 왔다. 골목길 곳곳에 이야기가 담긴 작은 보물 상자들을 열어보며 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날 밤 숙소에서 저녁을 먹으며 나누는 담소가 끝이 없었다. 밤이 깊어지자 하나 둘 자리를 떴지만 오랜만의 해후에 잠자기조차 아쉬운 친구들과 일어날 줄 몰랐다. 그때 옆에 앉아있던 친구가 나의 어깨를 감싸며 불편했던 얘기를 꺼냈다.

 

  점심을 먹고 통피랑 벽화마을로 이동하려 할 때였다. 일행 중 한 명이 변화된 나의 모습을 보고 왜 이렇게 뚱뚱해졌어.’ 그렇게 핀잔을 주다가 스스로도 흠칫했는지 미적거리며 자리를 떴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 말이 떠돌았지만 입은 조개가 되었다. 친구가 옆에서 듣고는 어이가 없어서 나대신 따지고 싶었지만 여행 중이라 분위기 망칠까봐 말도 못한 채 끙끙거렸다고 했다. 친구는 상처 받았을 나를 위로하기 위해 동피랑 언덕위에서 기다렸다며 내 등을 쓸어줬다. 친구의 말을 듣고 불현듯 작고하신 소설가 박경리 기념관에서 보았던 글귀가 생각났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자체가 문학이다.’ 라는 글이 생각나면서 , 이런 소소한 일들이 문학이구나.’ 그 순간 내 머릿속은 번갯불이 스쳐가듯 찌릿했다. 친구가 기다렸다는 길에서 문학이 보인 것이다.

 

  동피랑 언덕길에서 친구의 목은 기린이 되어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리며 나를 기다렸다. 바람은 친구의 마음을 전해주고 싶어 연신 나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 시각 나는 테라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노닥거리고 있었다. 봄 햇살에 취한 고양이가 내 종아리에 매달리며 몸을 비벼댔다. 고양이와 놀아 줄 양으로 핸드폰에 달린 작은 인형을 흔들며 유혹했다. 먹이를 사냥하려는 듯 고양이가 잔뜩 척추를 세우며 인형이 오가는 데로 취했던 눈이 말갛게 움직였다. 한참을 고양이와 놀아주다 그림이 그려진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친구가 목을 길게 빼며 기다렸던 길 위에는 걱정이 담긴 문학이 있었다.

 

  다음날, 충무공의 유적지인 제승당을 보기위해 배를 타고 한산도에 들어갔다. 밤새 비가 와서 그런지 먼지를 벗겨낸 길은 신선한 공기를 우리에게 선사했다. 봄꽃들도 비로인해 급했는지 나뭇가지에는 소담스럽게 듬성듬성 꽃들이 피어올랐다. 제승당에 가는 길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보였다.

 

  제승당 수루에 올라서 한산도 앞바다를 바라보며 충무공의 시를 읊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칼 옆에 차고 깊을 시름 하던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시름하는 일성호가의 애타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산섬 앞바다는 유유히 역사를 삼킨 채 흐르고 있다. 한산정으로 발길을 돌려 보니 군사들과 활쏘기 연습을 했던 거리가 145미터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과녁을 맞혀야 하는 훈련장이다. 거기에는 화살 하나라도 빠트리지 않겠다는 충무공과 군사들의 의지가 보였다. 그러나 바다에 잠들고 있는 화살은 몇 개나 될련지. 휘하에 모여든 장수들과 나라 걱정으로 지새웠던 밤. 시름들로 수심 깊은 바다는 한숨 섞인 시름을 삼긴 채 잔잔한 물결이 되어 여전히 흐르고 있다.

  제승당을 둘러본 길에는 충신의 애끓은 문학이 있었다.

 

  앞서서 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니 웃음이 저절로 나올 것 같은 문학이 걷고 있었다. 처음에는 혼자였던 친구가 둘이 되어 돌아왔던 날에도, 아이의 손을 잡고 셋이 되어 돌아온 오늘도, 행복의 문학이 보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모두들 조금씩 변화 되어 왔다. 문학기행에 기행보가 없어도, 작가들의 생가를 찾아다니지 않아도, 우리는 길을 걸으면서 문학을 만들 수 있고 이야기 할 수 있다. 기행 보조차 준비하지 않았다고 툴툴거렸던 나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새로운 문학에도 눈을 뜨는 계기였던 여행이다.

  동피랑 언덕길에 서서 기다렸던 친구의 초초함에서, 역사를 들려준 충무공 유적지에서, 앞서서 걷는 친구의 가족에서, 발견했던 감정과 감동들이 곧 문학인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자체가 문학이다.’ 박경리선생의 문학에 대한 의미처럼 우리는 어느 곳에서든지 문학을 만들 수 있다. 같은 길을 걷고 또 걸어도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매일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삶에 쫓기는 나날들 때문에 글을 다 담아내지 못할 뿐, 오늘도 문학이 길 위를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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