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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말을 걸어온다.

옥수수다 2021. 12. 22. 15:13

박물관이 살아있다.

                                                                사진이 말을 걸어온다.

 

 

                                                                                                                                             찰옥수수

 

  지인이 사진 전시회를 한다고 연락이 왔다. 바쁘다는 핑계로 동문들과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막상 길을 나서자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집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었지만 동문들과 오랜만에 만남이라 그날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비 오는 날에 외출은 언제나 구질 거려서 번번이 약속을 취소했던 나였다. 빗길을 걷다보면 바지 밑단이 젖어서 질척거린다. 우산 안으로 비가 들이치면서 입고 있는 옷, 심지어 들고 있는 물건까지 젖어들면 마음까지 치덕거리는 것 같다. 그런 거리를 생각하니 신발 안에 양말이 치덕거리자 발가락이 움찔거렸다. 그날은 친구들이 그리웠는지 치덕거리는 양말이 된다고 해도 뒤로 미루지 않고 연락을 받자마자 택시를 탔다.

  택시를 타고 비 오는 거리를 바라보는 기분은 상쾌했다. 빗방울이 차창에 부딪혀 굴러 떨어지면서 만드는 그림은 한 동안 못 본 동문들의 얼굴이었다. 달리는 택시 안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이미 그 곳에 도착했다.

  갤러리가 마련되어 있는 카페 안으로 들어서니 인상 좋은 주인이 안쪽을 가리켰다. 벽면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들을 보며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진 속에는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담겨져 있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작가가 여행 중에 만나 사람들을 담은 사진인 줄 알았다.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이었다. 가족들이 모여 음식을 나눠 먹기도 하고 아이들의 장난 끼 가득한 표정과 난생 처음 요리를 만들었는지 한박웃음을 보이며 찍어 보낸 모습도 있었다. 마치 사진이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었다. 책상 위를 올라가는 아이의 사진은 난 책상을 오르고 있어요.’ 케이크를 찍어 보낸 사진은 처음 도전 해본 케이크입니다.’ 마치 주문해 놓은 케이크를 받는 기분이었다. 그 케이크 앞에서 동문들과 담소를 나누며 기념하고 싶었다.

  다국적 사람들의 일상을 어떻게 찍은 것일까? 그들의 집을 방문하기란 힘들 텐데.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 채워질 때 손님을 배웅하던 작가가 돌아왔다. 작가의 모습을 보자마자 반가움에 한 달음에 두 팔 벌려 서로를 안았다. 작가는 동문이었다. 한참 안부를 묻다가 수많은 물음표를 보여주던 사진속의 사람들을 물어봤다.

  “작가님, 사진이 말을 거는 느낌이에요. 여행을 하면서 일부로 연출해서 담은 거예요.”

  나의 말에 여행 중에 찍은 사진이 아니라고 했다. 작가는 한국말을 가르치는 재능기부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교제를 보고 가장 기초적인 말부터 가르쳤는데 쉽지가 않았다.  배우는 사람도 힘들어하긴 마찬가지였다. 그 후 그들이 사는 모습을 사진으로 보내오면 일상생활을 토대로 주의에 있는 물건이나 상황에 대한 이야기 형식의 글을 가르쳤다. 일상을 토대로 배우기 시작하자 한국어도 쉽게 적응하게 되었다고 했다. 작가의 설명을 듣고 나니 우리에게 필요한 언어는 일상의 소품과 상황에 맞는 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님 말들어보니깐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과 상황으로 한국말을 배우면 훨씬 쉽게 이해 될 것 같아요.”

  나의 말에 작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 하고 있는 프로그램의 성적이 좋아서 전시회까지 열어줬다고 했다.

  작가에게 글을 배우는 사람들은 외국인 노동자들과 이주여성들이었다. 다국적 사람들이 메일이나 카카오 톡으로 일상을 보내오면 그 상황들을 글로 표현해 답장했던 사진들이 전시장을 가득 채워지게 됐다. 그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니 저마다 꿈을 안고 그 꿈을 위해 열심히 사는 모습들이 보였다.

  또 다른 손님이 들어왔다. 작가는 이층에 차 마실 곳이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난 이층으로 올라갔다. 창가에 홀로 앉아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으로 갔다. 창밖에 들어오는 풍경이 맘에 들었다. 창틀 유리로 비치는 모습은 마치 풍경을 찍어 걸어둔 액자 같았다.

  창틀 액자 안으로 감나무가 들어왔다. 가지가 휘어지도록 주렁주렁 매달린 감, 풍성한 가을 사진이다. 저 멀리 공장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 궂은 날씨 같은 건 모른다는 듯 바쁜 세상의 사진이다. 또 다른 창틀 액자 안으로 작은 화단이 들어왔다.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여린 잎이 흔들렸다. 마치 비 오는 날 화단의 오후 같은 사진으로 다가왔다.

  문득, 나도 창틀 안에 비춰지는 사진이고 싶었다. 내 사진은 비 오는 날 커피 한잔을 마시며 휴식하는 여인처럼 비춰졌으면 싶었다.

  눈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갑자기 요란한 발소리가 들렸다. 계단위로 동문들의 얼굴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반가움에 서로 포옹하며 웃음꽃이 만발하게 되었다.

  어느새 나이가 들어가는 동문들의 모습에서 인생의 사진도 보였다. 조금 더 젊은 우리들과 노느냐고 힘겨웠을 오빠는 핸드폰 속에 가득 채워진 손주들의 자랑에 입 꼬리가 올라가 내려 올 줄 모르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비슷한 나이에 아직도 결혼을 안 하고 있던 동문은 서로에게 시집, 장가오라며 장난 가득했다. 그들은 지금이라도 결혼할까하며 여전히 장난이다. 형 누나 틈에서도 언제나 의젓하던 막내, 잔심부름에도 얼굴 찌푸리는 일 없던 막내는 어느덧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동문들의 인생사진첩이 만들어 지는 동안 창가에 놓아둔 커피향이 한참동안 피어올랐다.

 

  오랜만에 만난 동문들의 삶은 아름다운 사람의 냄새가 난다. 누군가를 도와주고 나눠주는 삶으로 변해가고 있는 그들. 나이를 먹었다 해서 제자리에 머무는 삶이 아닌 어른으로써 함께 베풀며 살아갈 길을 시작한 그들.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 동문들의 얼굴을 한 사람 한 사람 명암 사진을 찍듯이 인생의 사진을 담아본다.

  삶의 곳곳은 이야기 세상이다. 바쁘게 살다보니 이야기를 모르고 지나 칠 뿐이다. 쇼윈도에 비쳐진 내 모습에서도 이야기가 흐른다. 하루 잘 견디고 버티어 냈다고. 따라다니는 그림자에서도 이야기가 비쳐진다.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가로등 불빛에도 이야기다 들린다. 무서워 말라고. 이렇듯 세상은 많은 이야기로 가득 하다는 걸 사진작가인 동문을 통해서 알게 된, 비 오는 오후에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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