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두렁 밭두렁
-찰옥수수
봄이 되면 시골은 바빠진다. 비닐하우스부터 시작하여 가을 농사까지 가려면 아이들의 고사리 손까지 빌려야 할 정도로 일손이 부족하다.
먼저 비닐하우스에 모종심기를 한다. 채소들은 밭에다 직접 씨앗을 심지만 참깨, 들깨, 고추 같은 씨앗 종류는 모종을 해서 어느 정도 자라서야 밭으로 하나씩 옮겨 심게 된다. 어른들이 밭고랑에 마늘을 심으면 아이들이 작은 발로 야무지게 흙을 덮어 밟아주며 싹이 잘 나오라고 햇빛과 지나가는 바람에게 부탁해 본다. 작년 봄, 잘 간수해 두었던 감자를 싹이 올라온 중심으로 뚝뚝 쪼개어 심어두면 초여름쯤 밭에서 수확하는 첫 번째 양식이다. 마지막으로 옥수수를 심고, 잘 자란 채소 모종을 옮겨 심고 나면 밭일은 얼추 마무리가 된다.
아버지가 논을 갈기 위해 쟁기를 챙기며 소를 몰고 나갔다. 모심기가 시작되면 아버지는 끼니때가 되어도 집에 올 수 없었다. 그럴 때면 엄마는 수건으로 똬리를 만들어 새참을 머리에 이고 논으로 향했다. 나도 주전자 하나를 들고 낑낑거리며 뒤따랐다. 저 멀리 아버지가 보이자 ‘아빠’하고 불러보지만 들리지 않았나보다. 마음이 급해지자 손발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 지지 않았다. 그때 들고 있던 주전자가 출렁이며 주전자 주둥이로 막걸리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줄을 잡고 있던 아저씨가 우리를 봤는지 소리쳤다.
“새참 먹고 합시다.”
그 말에 논바닥에 엎드려 일하던 아저씨들도 모심기 하던 일손을 놓았다. 아버지와 동네 아저씨들은 흙 묻은 손을 대충 씻어 내시고 새참에 둘러앉아 주전자에 가득한 막걸리로 먼저 목을 축였다.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면 갈증으로 인해 늘 술이 모자랐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내게 주전자를 건넸다. 나는 주전자를 들고 논둑길을 뛰었다.
논둑길을 질주하듯 뛰어보지만 질퍽이는 흙 때문에 연신 기우뚱거리더니 갑가기 다리가 ‘쭈욱’ 하고 앞으로 한없이 미끄러졌다. 다른 쪽 다리로 재빠르게 땅에 무릎을 짚었다. 하마터면 바짓가랑이가 찢어질 뻔했다. 겨우 위기를 모면하고 논둑길을 벗어날 때까지 손을 휙휙거리며 춤을 추듯 잰 걸음으로 동네 구멍가게로 내달렸다.
막걸리 한 주전자를 받아들고 논둑길을 걷고 있을 때 아버지와 아저씨들이 ‘캬아.’ 거리며 마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습에서 맛있는 소리가 났다. 호기심에 한 모금 홀짝 마셨다. 시원한 막걸리 한 모금이 목 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캬아.’ 하며 하늘에 대고 외쳤다.
그날 내 눈에 비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디푸른 바다 같았고, 풀 위에서 놀던 청개구리 녀석은 내 목소리에 놀랐는지 폴짝 뛰어올랐다. 청개구리를 잡으려고 손을 뻗어봤지만 재빠르게 물속으로 도망쳤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부랴부랴 몇 걸음 달려가다가 주전자를 들고 또 한 모금 홀짝거렸다. ‘캬아.’ 낑낑거리던 주전자가 어느새 구멍이 난 것인지 가벼워져갔다.
논밭에 씨를 뿌리고 모를 심고나면 또 다른 일거리가 기다렸다. 비가 오면 다행이지만 한 달이 넘도록 비가 오지 않으면 개울가에서 물을 길어다 텃밭에 줘야 했다. 뜨거운 햇빛에 타들어가던 잎들이 물을 주는 순간, 하늘로 기지개를 쭉 피듯이 살아났다. 물을 머금은 채소의 초록이파리가 탱글탱글 빛이 났다.
여름이 깊어갈 무렵이면 잘 자란 채소들이 밥상에 올라왔다. 흰 쌀밥을 한 양푼 수북이 퍼서 갖가지 채소들을 넣고 참기름을 넣어 고추장에 쓱쓱 버물었다. 볼이 미어터지게 한 숟가락 크게 떠서 입에 넣어 아삭아삭 씹을 때 맛은, 미술랭이 맛 집을 찾아 다녀도 맛 볼 수없는 여름 입맛이 돋았다.
농기계가 거의 없던 시절. 소에게 쟁기를 걸어 땅을 갈고 나면 오로지 사람의 손이 모든 일을 해야 했다. 모심기가 끝날 때까지 일일이 손으로 심다가도 새참이 오면 부서질 것 같던 허리도 아프지 않은지 어른들 얼굴에 웃음이 가득이다.
지금은 이앙기 한대가 돌아다니며 한나절이면 뚝딱 모심기가 끝난다. 논이든 밭이든 일하다가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면 어떤 음식이든지 배달이 되다보니 심부름하며 논두렁에서 홀짝이던 맛도 사라진지 오래다.
농기계들이 주는 편리함 속에서 가끔은, 술심부름하다가 하늘을 보며 ‘캬아.’하고 외치면서 기우뚱기우뚱 논둑길을 달리던 그때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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