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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계절

옥수수다 2021. 10. 27. 15:13

                                       

 

                                                 엄마의 계절

 

 

 

 

                                                                                                                                           찰옥수수

 

  엄마의 계절은 언제나 풍성한 제철 먹거리로 알 수 있다. 엄마는 바쁘게 밭일하다가도 허리를 펴면서 잠시 산을 살폈다. 산에서 피는 꽃을 보고 계절이 바뀌는 것을 직감했다. 뒷산을 바라보던 엄마는 바구니를 허리춤에 끼고 밭에 무언가를 심기위해 나갔다.

 

  어느 날 늦잠을 자고 있던 내 귀에 아버지와 엄마가 내방 창가에서 투탁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산에 노란 꽃이 피었는데 감자는 언제 심으라고 아직도 밭을 갈아주지 않아요.”

  “재 넘어 최씨네 밭 갈아주고 한다니깐.”

  “내 집 일부터 해 놓고 남의 일을 해줘야지 당신은, 어찌 그라요.”

  “갔다 와서 해 놓을 게.”

  아버지는 해주겠다는 말만 하고는 길어질 것 같은 엄마의 잔소리에서 달아나듯 쟁기를 챙겨 나갔다. 엄마 말을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남의 집 밭을 먼저 갈아주기 위해 나가자 엄마는 아버지로 인해 역정이 나서 연신 혼잣말을 했다.

  “어찌, 저렇게 남이 해달라고 하는 건 득달같이 해주면서 내 집 일은 뒷전이여. 산에 저렇게 노란 꽃들이 지천으로 피었는데, 감자며 파며 마늘은 언제 심으라는 것이여.”

  엄마가 말하는 산에서 피는 노란 꽃이 무엇인지 몰랐다. 며칠 후 그 노란 꽃이 산수유라는 걸 알았다. 산수유 꽃이 피기 시작하면 감자와 파 모종을 해야 하고 열무도 심어나야 초여름 먹거리가 생기기 시작하는 시기였던 것이다. 엄마의 마음은 부엌에 있는 부지깽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인데 아버지는 급할 게 없었다. 늘 남의 집 일이 먼저였다. 아버지에게 화풀이를 하듯 빗자루로 마당이 파일 것처럼 거칠게 쓰는 소리가 났다.

  엄마를 찾는 것은 쉬웠다. 언제나 엄마가 있는 곳은 텃밭이었기 때문이다. 최씨네 밭을 갈아주고 해준다던 아버지가 언제 밭을 갈아 놓으셨는지 엄마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오밀조밀 온갖 먹거리를 심기위해 조그마한 밭뙈기에서 돌들을 골라내고 있었다. 머리에 질끈 동여맸던 수건이 이마 위에 흘러내려서 엄마는 사람들이 오고가는 줄도 모른 채 밭을 고르느냐 바빴다.

  “엄마! 뭐해요.”

  내가 부르자 엄마는 잠시 일손을 놓고 돌아봤다. 머리에 쓴 수건이 어깨까지 흘러 내려와 있지만 장시간의 햇빛은 수건으로도 막을 수 없는지 엄마의 얼굴은 숯검댕이가 되었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 배도 안고프냐 들어가 밥 먹어.”

  “도와줘요?”

  “할 거 없다. 밥이나 먹어.”

  엄마의 기분이 조금은 나아져 보였다. 아버지가 슬그머니 밭을 갈아주셨기 때문이다.

 

  어느 날 집에 들어서는데 아카시아 꽃이 보였다. 나뭇가지 채 꺾어 와서 그런지 소담스러운 꽃을 보니 마치 숲속에 들어서는 듯 하얀 꽃의 향기가 방안을 가득 채워 기분이 좋았다.

  “엄마, 웬 꽃이에요.”

  “, 아버지가 꺾어다 주었다.”

  “아빠가요? 와아! 울 아빠 꽃도 꺾어다 주시고 센스 있으시네요.”

  “센스는 무슨, 밭에 참깨 심으라고 따온 거다.”

  “참깨요? 참깨하고 아카시아 꽃 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날 아침, 참깨를 왜 아직 심지 않았냐며 아버지가 엄마를 타박했다. 엄마는 아직 아카시아 꽃도 피지 않았는데 참깨를 일찍 심어서 뭐하느냐고 볼 맨 소리를 했다. 밭에 곡식 심는데 여념이 없던 엄마는 뒷산에 가득 핀 아카시아 꽃을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아카시아 꽃이 피었다고 해도 엄마가 믿지 않자 두 분은 언성만 높아질 뿐이었다.

  “참깨 심으라면 심지 뭔 넘의 아카시아 타령이야 으이그.”

  그렇게 말하고 논일 나갔던 아버지는 아카시아 꽃이 주렁주렁 달린 나뭇가지를 낫으로 베어와 엄마 얼굴에 들이 밀었다.

  “이래도 아카시아가 안 피었어?”

  엄마는 절기를 몰랐다. 산에서 피는 꽃에 따라 밭에 어떤 씨앗을 심어야 할지 가늠했었다. 그날은 엄마가 아버지로부터 난생처음 꽃을 받은 날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참깨를 심게 하려고 꽃을 꺾어다 주었다며 엄마는 무심한 듯 말을 하면서도, 엄마의 눈은 연신 아카시아 꽃이 놓아져 있는 곳을 힐끔 거리며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물방개마냥 아카시아 꽃 주의를 빙빙 돌며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짝 홍조 띤 모습을 보니 엄마도 영락없는 수줍은 여자였다.

 

  집이 조용해서 텃밭에 가서 엄마를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엄마.’하고 몇 번을 부르자 엄마 키보다 훌쩍 자란 옥수수 밭 사이에서 나왔다. 엄마는 한웅큼 뽑은 풀을 두엄 위에 획 던졌다. 엄마가 나온 옥수수 밭을 들여다봤다. 옥수수 사이사이에 콩들이 자라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엄마의 텃밭은 어느새 풍성해져 있었다.

  한 여름의 햇빛아래 엄마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밭은 잡초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정갈했다. 옥수수 밭 근처 둔덕에 두 줄로 역어 놓은 오이와 가지가 보였고 부추와 상추 그리고 쑥갓이 있다. 감자를 심었던 밭에는 고구마 줄기가 너울너울 엮여있었고 한쪽에는 파와 토마토도 있다. 고추밭과 나란히 열무도 배추도 있다. 심지어 개울 근처까지 뻗은 엄마의 손길에 노란호박꽃을 가득 피어냈다.

  엄마는 절기를 모르지만 언제나 산에서 피는 꽃에 따라 엄마의 텃밭도 하나하나 맛있게 자리를 잡아갔다. 옥수수 밭의 풀을 다 뽑으신 엄마는 조그마한 밭 한쪽에 또 무언가를 심기 시작했다. 어떤 먹거리가 자랄지는 한참을 기다려야 하지만 엄마의 텃밭은 오늘도 풍성해지고 있다.

 

  평소에는 싸움이 없으신 아버지와 엄마가 유일하게 언성이 높아지는 봄. 두 분의 열정으로 텃밭에 골고루 심어놓은 갖가지 채소와 곡식으로 풍성해지는 여름. 햇빛 좋은 날 마당 한쪽 멍석 위에 고추를 따서 말리는 붉은 가을. 이집 저집을 다니며 서로 김장김치 품앗이를 하는 겨울.

  김장이 끝나고 텃밭에 눈이 쌓이면서 엄마의 계절도 잠시 숨고르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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